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천보 전투 (문단 편집) == 기타 == * [[야인시대]]의 22화[* 해당 에피소드는 [[김두한]]이 만취 상태로 뭉치패의 습격을 받아 조직이 뿔뿔이 흩어져 피신한 상황이었다.] 중반에 악질 경찰 [[미와 와사부로(야인시대)|미와 경부]]와 그 부하들의 입을 통해 이 보천보 전투가 언급되는 부분이 짤막하게나마 등장한다. 미와 경부는 부하들에게 일의 경위를 듣고는 "이런 멍청한 것들…! 도대체가 그곳 경찰들은 뭐하는 자들인가!! 칙쇼!! 칙쇼!!'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야…! 어떻게!!" 라고 펄펄 뛰며 분노하더니 [[특별고등경찰|고등계]]에 명령하여 비상령을 선포한다. [[김일성]]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고 '동북항일연군 소속 조선인 부대'라고만 나온다. * 한국 사회에서는 이 전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다. 북한의 선전선동과 달리 실제로는 보잘것없는 전과, 무고한 민간인이 사망했다는 점, 그리고 결정적으로 무장단체의 총책 역할을 했다는 [[김일성]]이 아예 자기의 부대가 있었는데 그 부대가 보천보 전투를 이끌고서는 심지어 1945년 8월에 일본군을 몰아내며 북한군이 되었다는 등의 과대선전을 통해 훗날 권력을 잡는 데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. 그러나 이 전투는 독립운동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전투이고 한국사에서도 이 점을 짚고 간다. * 김일성이 아닌 동북항일연군의 지휘관이나 조직원 중에는 해방 직전까지도 소련에 가지도 않고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경우도 있었다. [[http://contents.history.go.kr/mobile/nh/view.do?levelId=nh_050_0040_0020_0030_0030#ftid_758)|#]] 만주에서 가장 늦게까지 일본에 저항하다가 전사한 [[허형식]]은 [[이육사]]의 〈광야〉의 모델이라는 설도 있다. [[https://m.khan.co.kr/politics/politics-general/article/201901220600055|#]] * 국내의 지하조직을 통해 그날 저녁 주재소 경찰들이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은 소장의 환송연을 벌여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이라는 정보까지 파악하는 등 이미 상세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북항일연군 입장에서는 그리 큰 위험이 있는 작전이 아니었으며 사실 전과의 면에서 본다면 추격해온 일본 경찰대를 궤멸시킨 [[구시산전투]]나 일본군 74연대에 대승을 거둔 6월 30일의 [[간삼봉전투]]가 훨씬 더 큰 전과를 거둔 전투였다. 그렇지만 정치적 의미에서 보천보전투는 유격대의 총알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유격대의 존재를 알린 대사건이었다. 한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이자 독립군의 활동이 희미한 옛 기억으로 사라져가던 시기에 일어났던 보천보 전투는 반세기가 넘게 한국사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김일성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. * 1944년 11월 평양사단에 징집된 [[학병]]들이 탈출을 준비했을 때 그들의 목적지는 보천보였다. 불행히 실패로 끝난[* 한국인 헌병보조원의 밀고로 발각되어 70여 명의 주동자가 붙잡히고 말았다. 1945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최고 8년에서 3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[[8.15 광복]]과 동시에 출옥하였다.] 이 학병 탈출 사건의 지도부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. 그런데 그들이 보천보로 가려고 했다는 사실은 보천보 전투가 조선의 대중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는가를 잘 보여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